31_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회암사 by 도시애들


매일 비가 오다가 오늘따라 조금 비가 주춤 하다. 주춤 하다는 것은 완전히 끝났다는 것 보다 웬만큼 돌아 다닐만 하다는 그런 뜻도 될 것이다. 지난번 서삼릉을 다녀올 때 불현 듯 생각난곳이 있다. 이곳이 회암사 인 것이다. 내가 보충대에서 어떤 문제로 늦게 배출이되어 회암리 신병교육대로 갔을 때에는 내 동기들은 벌써 2주이상의 교육을 받은후였다. 나는 그져 내무반이나 지키는 그런 신세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어느날 나도 훈련병을 같이 따라 훈련을 하려했다. 그것은 너무 무료한 세월 탓이다.

그러나 따라 다니는 것만해도 너무 엄청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직 군단 연예대 편입사병으로 대기병 신세이지만 교육을 받는 내 친구들? 은 정말 그대로 육군의 병 교육을 그대로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비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군(軍)이야기가 아니라 내 가족의 이야기를 하기위해 시작을 하게 된 것이다. 훈련을 받으러 가는 병사들을 따라 나도 훈련을 받는 것처럼 힘들 게 쫓아다녔다. 그러나 나는 군생활 하기전 직업이 美8군 음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101보충대를 지나 26사단 정훈조로 넘겨 진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동기들과 같이 생활하는 것이 더욱 즐겁게 느껴졌다.

[회암사지 입구의 화사한 아카시아...]

즐겁다는 뜻은 동기는 훈련받고 돌아와 그래도 내가 아양을 떠는 제스츄어로 동기들과 선배들이 피로를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러다 어느날 훈련나가는날 같이 따라갔는데 근처에 멋진 능과 우물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목을적시며 이렇게 생각을 했었다. 아....어느 멋진 집안의 벼슬을 하신 어른의 산소 이구나..하며 지났던 그 릉? 이 우리 증조 할아버지 산소일줄은 그 누가 알았겠는가?...우선 이런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6.25사변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힌다.

[회암사지 입구의 탐스러운 아카시아...]

나중에 안 것이지만 우리 집안은 이씨조선 말기에 시종집으로써 종3품의 벼슬을 지낸 집안이라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청와대 비서실장쯤 되는 직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6.25 사변으로 인해 가족들이 헤여저 나는 지금도 아버님 얼굴도 모르고(기억이 안남)환갑을 가까이 이날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이야기를 계속하다보니 이상하게도 이런이야기를 계속 하게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가 26세때 우리 문중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당숙의 뒤를 따라 증조부의 산소를 찾았을 때 내가 회암리 군생활 할 때 지나쳤던 그 릉같던 산소 인 것이다.

우물도 그대로 산소도 그래도 또 옆 산지기의 집도 그대로이다. 아마도 이럴 때 그 산소를 호화 묘소라고 욕을 했으면 어떻했을까 하는 그런마음도 들 정도이었다. 이에 이어서 가족들과 만나고 우리 집안의 경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옛날로 돌아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세상은 좀 다르리라. 그냥 그렇게 할아버님 산소앞의 회암사지를 둘러볼 수 밖에.....

[발굴지 위쪽에서 내려다본 회암사지...]

회암사 아래에 자리한 이 터는 천보산 언덕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창건에 관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인 1328년(충숙왕 15)에 승려 지공(指空)에 의하여 현재의 가람을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중국에서 돌아온 나옹(懶翁)이 중건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자초(自超 : 무학대사)가 머물면서 태조의 특별한 배려를 받았다. 1472년(성종 3년)에는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가 다시 중건하였는데, 현재의 기단과 초석, 석축(石築) 등은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회암사는 중종의 비인 문정왕후에 의해 중창되는데,

문정왕후의 불교에 대한 관심으로 인하여, 회암사에 거처하던 승려 보우(普雨)가 조선중기 불교 중흥의 주도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사후 보우(普雨)는 중신들의 상소로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로 인해 보우(普雨)가 머물렀던 회암사도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의 회암사는 지공(指空)이 창건한 이래 보우(普雨)가 거처하던 때까지 약 200년 가량 번창하다가 조선 후기 절의 세력이 계속 기울어 폐사되었다. 현재 회암사지는 8개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단 석단으로부터 제8단 석축벽까지 단을 차이나게 하여

[발굴지 위쪽에서 내려다본 회암사지...]

건물을 조성하였다. 확인된 건물지는 약 30여개 소에 이르며, 건물배치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200년간의 쌓인 유구들이 걸쳐 있어 다른 사찰과는 다른 모습이다. 회암사지 유구들의 특징은 첫째, 제1단부터 제8단까지 높이를 달리한 점, 둘째, 대규모의 축단과 석단ㆍ석벽을 조성한 점, 셋째, 세로로 이어지는 건물 배치, 넷째, 주전각을 중심으로 한 좌우대칭의 전각 구성, 다성째, 돌계단 옆면을 막아 세우는 소맷돌의 치석수법 등은 궁궐 건축에서 나타나는 기법으로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성과 배치법을 보여준다.

이외 회암사지 내부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팔각원당형 부도를 비롯하여 경기도 민속자료 제1호인 회암사지 맷돌, 향토유적 제13호인 당간지주 등 고려시대 유물을 비롯하여 다양한 석조물이 남아 있다. 현재 회암사지는 북에서 남으로 퍼진 부채꼴의 땅 8,206평에 그 유구와 유적들이 남아 있으며, 경기도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기도는 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ㆍ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박물관에서 조사ㆍ발굴하고 있다.

앞으로 사적지내 사유지를 매입하고 원형 그대로 발굴한 후 문화와 역사적 가치창출로 지역의 전통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회암사지의 맨 오른쪽 꼭대기에 자리한 사리탑...]

언덕에 사리탑 하나가 솟아있는데, 총 높이가 596c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부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층으로 쌓은 팔각의 받침 위에는 둥근 모양의 장식없는 탑신(塔身)과 팔각지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탑신과 지붕에 비하여 여러 단으로 된 받침이 매우 높은 편이며, 부도탑 전체가 밑변이 좁고 삐죽하고 길다랗게 솟은 삼각형 형태의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탑신을 받고 있는 여러 단의 팔각받침 등에는 기린, 용, 꽃, 덩굴무늬 등과 팔부중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 부도탑은 누구의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지만, 보우(普雨, ?~1565)의 부도라는 설과 1472년 회암사 중창 때 사찰을 일신한 처안(處安)의 공적을 기린 부도탑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복원할 회암사지의 조감도...]

[지금도 발굴작업에 힘쓰고 계신...]

[회암사지 제일 중앙에 있는 계단의 아름다움...]

[그냥 바라만 보아도 옛생각이 날 것만 같은 회암사지터...]

[이곳이 제일 잘 보이는 곳이라 전망대라 칭하고 시작했다...]

[사찰내에 개별꽃이...]

[사찰내의 봄의 전령 꽃마리도...]

[회암사지 정 중앙밑에서 위를 바라보며...]

[회암사지 정중앙의 제일 밑 계단 세곳....]

[회암사지 괘불대 같은데...]

[회암사지 중앙앞의 당간지주석 ...]

[회암사지에서 발굴된 기와들...]

[회암사 설법전(종무소)...]

회암사지에서 위로 올라 회암사 초입에 들어서면 보이는 건물인 설법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건물이다. 1층은 콘크리트로 지어져 현재 종무소와 식당으로 사용되며, 2층은 목조건물로 신도들의 강당 겸 스님들의 요사채로 활용되고 있다. 설법전에 걸려있는 현판으로 사찰의 이름인 "회암사(檜岩寺)"라는 글이 적혀 있다.

[회암사 부도군 오르는 계단...]

[무학대사 부도와 쌍사자석등...]

[무학대사(無學大師) 부도탑, [보물 388호]...]

이 승탑은 나옹화상의 제자이며, 태조 이성계의 조선왕조건국을 도운 무학대사의 묘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팔각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높이는 약 2.7m로 현재 회암사 북쪽의 능선 위에 나옹ㆍ지공 두 선사의 탑과 함께 세워져 있다. 기단은 8장씩의 긴 돌로 2단을 쌓고, 그 주위로 8각의 난간을 설치한 모습으로, 난간의 모서리 위쪽에는 보주(寶珠)가 있는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탑의 지대석은 한장의 8각석재로 각 면에 구름무늬를 굵은 선으로 조각하였으며, 하대석의 윗면에는 연꽃잎을 새겼고, 각 모서리 끝에 귀꽃을 장식하였다. 중대석은 배가 불룩 나온 모양으로, 각 면에 꽃문양이 있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연꽃받침과 팔각받침돌로 이루어진 상대석은 연꽃무뉘가 하대석과 같지만 귀꽃 장식이 없으며,

팔각 받침의 각 옆면에는 네모꼴의 구획을 마련하고, 내부에 각기 당초문을 양각하였다. 탑신은 괴임돌 없이 평평하게 처리된 상대석 위에 원형으로 표현되며, 표면에는 구름과 용이 가득 조각되어 있다. 특히 용의 머리, 몸체, 비늘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있으며, 구름무뉘 또한 뒤엉킨 몸체 사이에 빈틈 없이 조각되어 있어 생동감을 한층 더해 주고 있다. 탑신부의 지붕은 평박한 편으로 전각의 반적이 다소 감소되어 있으며, 각 우동마다 용머리가 하나씩 양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지붕 꼭대기에 구멍을 뚫고서,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설치한 간소화된 형식으로 아랫 부분에는 2단의 원반 받침을 구비하였다. 현재 보물 제 388호로 지정되어 있다.

[회암사 무학대사 비옆에 있는 귀부...]

조선 초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 자초(自超, 1327∼1405)의 비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3대 화상으로 유명한 지공(指空)ㆍ나옹(懶翁)ㆍ무학의 부도가 있는 회암사 터에 세워져 있는 이 비석은, 1410년(태종10) 왕명에 따라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공부(孔俯)가 글씨를 써서 세워졌으나, 1821년(순조 21)에 인위적으로 파괴되어 후에 다시 세워졌다. 현재 서 있는 비는 1828년에 다시 만들어진 중건비(重建碑)로 낮은 지대석 위에 높은 사각받침을 놓고 비신을 세웠으며, 날렵한 팔각지붕이 올려져 있다. 비신에 비해 받침이 크고, 지붕은 낮고 작은 편으로, 지붕의 처마와 추녀는 한껏 들려 있고, 안쪽에는 겹처마와 겹사래 등이 보인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1호로 지정되어 있다.

[회암사 쌍사자석등...]

무학대사(1327∼1405) 부도 앞에 세워져 있는 이 석등은 전체적으로 평면이 사각형의 형태로 간주석(竿柱石)에 두 마리의 사자가 배치되어 있어 쌍사자 석등이라 불리고 있다. 높이 2.6m로 석등의 평면은 네모꼴이고 지대석과 하대석은 한데 붙여서 조성된 모습이다. 하대석의 각면은 연꽃 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그 안에는 여의두문이 새겨져 있으며, 간주석(竿柱石)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서로 마주 보며 하대석을 딛고 상대석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 형태는 신라 이래의 전통을 따랐으나 가슴과 배가 서로 붙고 엉덩이가 밑에 닿아서 표현이 매우 상징적이며 추상적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앞다리도 매우 짦아 빈약해 보이며 전체적으로는 키가 작아 육중한 상층부를 지탱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상대석의 아래 면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등불을 올려놓는 화사석(火舍石)을 두 장의 돌로 세워 만들었는데, 두 면에는 화창(火窓)을 두고 있다. 지붕은 사모지붕 형태로 각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되었고, 정상에는 보륜(寶輪)과 보주(寶珠)를 놓았다. 이러한 모양은 조선초기 석조물의 옥개 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신라석등 이래 특이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회암사 쌍사자석등을 받히고 있는 쌍사자...]

[회암사 지공선사비(指空鮮師碑)...]

비의 총높이는 365cm로 네모꼴 받침돌 위에 홈을 파서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형식입니다. 원래 1387년에 세웠던 것이 도중에 파괴되어 1828년에 다시 조성하였습니다. 비 옆에는 비신을 올려놓는 흠이 없는 거북받침돌인 귀부(龜趺)가 하나 남아 있다.

[지공선사(指空鮮師) 부도 및 석등...]

회암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선종(禪宗)의 맥을 형성했던 승려 지공(指空)ㆍ나옹(懶翁)ㆍ무학(無學)이 머물며 포교했던 곳으로 유명한 절이다. 절의 동쪽 능선에 세 승려의 부도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위쪽에 있는 것이 지공(指空)의 탑과 석등으로, 1372년에 건립되었다. 탑은 팔각원당형의 양식으로 팔각의 지대석 위에 상중하대의 기단을 두었다. 각 부분은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대석은 배가 불룩 나온 모양으로 아무런 조각이 없다. 지붕돌은 큰 편이며, 길쭉한 상륜부 정상에는 5개의 보륜(寶輪)과 보주(寶珠)가 조각되어 있다.

석등은 방형의 상ㆍ중ㆍ하대석 위에 2매석으로 된 화사석을 두고 사각의 옥개석을 둔 모습이다. 평면은 사각형으로, 기단부의 상대석은 상ㆍ하를 경사지게 표현하였으며, 등불을 올려두는 화사석(火舍石)은 사모 지붕의 형태로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으로 마감하였다. 지붕돌은 탑과 같이 큰 편으로, 정상에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보주(寶珠)가 있다. 석등 역시 탑과 마찬가지로 조각이나 장식이 없어 단순 소박하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승탑과 석등 앞에는 지공선사의 비석과 거북받침이 세워져 있다.

[지공선사(指空鮮師) 부도...]

[지공선사 부도옆 석판의 글...]

[나옹선사(癩翁鮮師) 부도와 석등...]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제존자 나옹(懶翁)의 부도와 석등으로, 지공선사탑(指空禪師塔) 위편 북쪽으로 20m쯤 떨어진 언덕에 있다. 탑앞에는 네모난 석상이 있고, 그 앞쪽에 석등이 있는 남북 일직선상의 배치를 보여준다. 탑의 평면은 팔각을 기본으로, 원형으로 이루어진 탑신과 상륜이 결합되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팔각의 지대석 위에 상중하의 기단을 두었으나 장식이 없고, 팔각 지붕돌 위에는 보륜(寶輪) 4개를 얹은 다음 노반(露盤)과 보주(寶珠)를 놓았다. 지붕돌은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이 두툼하며, 처마는 전각에서 조금 반전되었다.

높이 4.6m, 가로와 세로 각각 1.15m이다. 또 탑 앞에는 직사각형의 석상(石床)과 석등이 있다. 석등은 평면 사각형으로 화사석(火舍石)과 지붕에 비해 대석(臺石)이 단순하여 투박해 보이기도 한다. 또한 다른 승탑(僧塔)과 비는 함께 세워져 있는데, 나옹의 비와 탑은 골짜기를 건너 맞은 편 언덕에 서로 떨어져 세워져 있다. 현재 탑과 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탑군에서 내려다본 회암사 경내...]

[나무속의 개미떼들...]

[신도들의 정성이 담긴 기도터엔...]

[회암사 삼성각...]

가람에 있어 맨 상층에 자리한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이다. 건물은 나지막한 토층 위에 기단을 쌓고, 두리기둥을 세워 지붕을 지탱한 모습으로, 건물 외부에 편액과 4기의 주련이 걸려 있다. 건물 전면은 2분합의 띠살창호로 마감하고, 건물 삼면에 산수화를 비롯한 무위자연하는 선인들의 풍경을 벽화로 그려 놓았다. 건물 내부에는 1983년에 조성된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단 위로 운룡문으로 장식된 닫집을 가설하여 감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회암사 영성전...]

대웅전 아래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건물로, 회암사에 주석했던 세화상, 곧 지공, 나옹, 무학의 진영과 함허특통의 진영을 모신 전각이다. 기단은 대웅전과 같은 가구식 기단으로 2단을 쌍아 조성하였다. 건물 외부는 중앙에 편액을 두고 전면에 3ㆍ4분합의 격자살 창호를 두른 모습으로, 외벽을 단청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다. 건물 내부는 벽과 맞닿은 불단 위에 조선후기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봉안하고 후불탱으로 가사탱과 삼화상의 진영을 모셔 놓았다. 후불탱은 근래 조성한 것으로, 스님들의 가사 중 25조 가사를 도안하여

그 내부에 여러 불보살과 경책, 그리고 나한을 장식한 독특한 불화이다. 진영은 4구로 삼화상 진영은 조선후기에 함허득통 진영은 근래에 조성한 것이다. 지공화상(指空和尙) 진영은 풍채가 당당하고 수염이 많다는 기록과는 달리 왜소한 모습으로 회청색과 붉은색이 혼합된 가사를 입고 있으며, 머리에 삼산형의 보관을 쓰고 있다. 제발은 서천국백팔대조사지공화상(西天國百八代祖師指空和尙) 진영이라 쓰여 있다. 나옹화상(懶翁和尙) 진영은 지공화상과 동일한 가사를 입은 모습으로 손에는 주장자와 염주를 들고 있다.

머리는 민머리로 약간 비스듬히 자세를 틀고 있으며, 우측에 고려국공민왕사나옹대화상진영(高麗國恭愍王師懶翁大和尙眞影)이라는 묵서명을 가지고 있다. 지공화상 진영과 함께 조선후기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무학대사 진영은 나옹과 지공과는 틀린 모습으로, 민머리에 녹색 가사를 입고, 손에 는 주장자와 염주를 들고 있다. 지공ㆍ나옹진영과는 달리 화면 바탕에 배경이 있는데, 수륙산수화풍의 병풍을 두르고 있어 주목된다. 크기는 지공ㆍ나옹화상 진영은 높이 112.5㎝에 폭 79㎝이며, 무학대사 진영은 높이 105㎝에 폭 78㎝로 전형적인 진영의 규모이다.

[회암사 대웅전...]

가람의 중심에 자리한 주법당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건물이다. 1976년 낙성되어 몇차례 개와과 단청 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은 2단으로 쌓은 가구식 기단 위에 길다란 장방형 대석을 기단삼아 자리하며, 원형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 건물 외부에는 편액과 주련 4기가 걸려 있으며, 문살은 3ㆍ4분합의 격자살 창호로 마감되어 있다. 건물 외벽은 모두 단청되어 있으며, 3면에 십우도와 석가모니 탄생장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건물 내부에는 불단 위로 아미타, 관음, 지장의 아미타삼존상과 불화로는 석가모니후불탱, 신중탱, 지장탱 그리고 범종 하나가 봉안되어 있다. 불상과 불화 모두 1994년 조성된 것으로, 불화는 금어 박갑용이 조성하였다.

[회암사 설법전이 뒤쪽에서 보면 단층 건물로 보이고...]

[대웅전과 영성전이 각기 방향을 틀어잡고...]

[회암사지 발굴지에서 발굴된 문화재...]

[회암사지 발굴지에서 발굴된 문화재...]

[회암사지 발굴지에서 발굴된 문화재...]

[보광전지 출토 토수라 쓰여있다....]

[회암사지 발굴지에서 발굴된 문화재...]

[정축년 3월 홍무 30년이라 쓰인...]

회암사지 발굴지에서 발굴된 문화재가 발굴터 옆 간이건물로 지어놓은 콘센트 막사 안에 전시되어 있다. 규모로 보았을 때 대단한 사찰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빨리 발굴이 끝나고 복원이 되어 옛모습을 되찾은 회암사를 보고 싶어진다. 역사는 흐르지만 흐르는 강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까닭에 오늘도 이렇게 아쉬움이.... -<끝>-

덧글

  • 기분좋은하루처럼 2008/06/10 18:59 #

    흠 흠...사연이 잇는곳이네요.
    글고 .미8군에서 음악을 하셨네요....
    어쩐지...ㅋ
    지금 시간이 조금 나길래....
    새벽에 다시봐야 할듯...ㅎ
  • 도시애들 2008/06/10 23:50 #

    흐미..운제 이렇게 자세하게 써놨노..
    참나원.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에효..또 생각이..머리를..
    원주서 가져온 더덕 동동주나...
  • 기분좋은하루처럼 2008/06/11 00:15 #

    크~~맛나제...동동주라카믄...
    안주는 뭘로...??
  • 도시애들 2008/06/11 00:20 #

    칼치 궈놓은거 먹었더니
    동동주하고 맞질 않는것 같아
    즉시 김치로 교체..ㅋㅋㅋ
  • 투명장미 2010/02/02 15:13 #

    재건이 되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았나 봅니다. 깊은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네요.
    '어느 멋진 집안의 벼슬을 하신 어른의' 손자...전쟁으로 인한 단절...할아버님 산소도 모르고 지나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마음 아픈 현실이었습니다.
    연예대라니..음악을...못하시는 것이 없으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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