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구간] 장수군 장수읍에서 전남 구례읍까지.... by 도시애들

19번도로[19구간] 장수군 장수읍에서 전남 구례읍까지....


[알맵지도 사용]

곡성친구 '성산'과 같이 내려가는 여행 또한 맛이 다르다. 혼자 달리고 혼자서 사물을 볼 때엔 놓치는 것도 많고 또 지나치는 것도 많지만 눈이 넷이라 그런지 놓치는 곳 없이 19번도로를 정말로 빗자루질 한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장계에서 만나 같이 내려와 이제 장수까지 내려왔다. 장수와 논개사당에 대한 여행기는 여행넉두리 <86>번에 잘 나와있어 이번여행에서는 시간상 그냥 지나치었다. 시간이 좀 허락한다면 논개 생가를 찾아봤으면 좋았을 터인데...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장수읍 느티나무 아래 앉으셔 "이제는 논개 생가에서 19번도로로 나오는 길이 뚫렸으니 걱정말고 논개 생가를 다녀오라" 신신 당부하시던 영감님의 말씀이 귓전에 들리는 듯 하다. 물론 유적지를 찾아볼 때 기념관 쪽엘 가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실제적인 위인들과의 교감은 생가터나 묘소에 가면 더욱 짙은 감동을 느낄 때가 많다. 그래서 생가와 묘소를 찾는 것이 아닐지?...장수읍을 벗어나 남원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금방 수남초등학교를 만날 수 있다.

[수남초등학교 교정...]

수남초등학교 교훈은 "슬기롭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행하며 튼튼하게 자라자!" 이다. 어릴 때의 목표는 창의적이고 올바른 생각과 튼튼한 몸을 요구하는 그런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나이가 먹어가면 갈수록 정말로 환경과 시련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며 또 건강한 몸을 지탱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란 것을 느낄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이행하지 못한 그런 바보스러움을 지금에 와서 후회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나도 후자에 속하지만...

교화는 장미, 교목은 은행나무, 교조는 노고지리이다. 드물 게 노고지리라는 새 즉 종달새를 교조로 택한 수남초교이다. 수남초교이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55년 장수초교 분교로 설립 1957년 수남국민학교로 승격하였다 한다. 규모로 보아 많은 학생수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담하고 또 예스러운 그런 학교임엔 틀림없다.

[효자 정공 종목 지비(孝子 鄭公 鍾穆 之碑)...]

장수읍에서 수분리를 오르면 수분령에 도달하게된다. 이곳에는 휴게소가 있고 또 약간의 조경도 해놓았다. 이곳도 여행넉두리에 자세히 그림이 있어 생략하고 내려섰다. 이곳을 내려서면 장수군 번암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산골의 상징같은 장수군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높은산을 넘어오면 또 평야지대는 아니지만 사람 살 만한 넓은 들판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곳 삼거리도 예부터 내려온 오래된마을 같아 보였다. 길에서 조금들어간 국포리의 천변에는 아담한 효자비각과 비가 자리하고 있다.

[번암면 죽산리 마을...]

번암 죽산리에는 죽산온천이 유명하다. 그리고 온천주위에는 방화동 계곡이라는 아주 깊고 조용한 계곡이 있다. 지금은 많이 개발이되 청소년들 엠티장같이 되어 버렸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다시 고요한 산속 휴식 터를 만날 수 있다. 이곳도 여행기에 있어 생략하고 넘어간다. 이곳입구를 지나며 사암리의 윗용소, 아랫용소지나 공사 중이던 생각이 난다. 이길이 개통을 하게 도면 장수에서 거꾸로 들어와 즐길 수 있게 되어 학생들의 야영장으로 더욱 멋진 채비를 해놓았을 것 같다.

방화동계곡 입구를 지나면 바로 동화호가 보이는 번암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은 길이 몹시 휘어있는 아주 위험한 곳이 있다. 바로 이곳에 육모정이라 일컫는 반계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숲속에 숨어있어 그만 지나치고 말았다. 그리고 길이 좁은 관계로 주차할 공간도 없어 어차피 번암에 주차를 시키고 올라가 보는 것이 서로들 편할 것으로 생각된다.

[취헌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는 육모정인 반계정...]

반계정(磻溪亭) - 번암면 향토유적. 소재지: 번암면 노단리 "반공의 휘는 안택(安擇)이요 자는 사유(四維) 아호는 취헌 (翠軒)이다. 공은 제세구휼하는 일을 평생 몸소 실천하시고 만인적덕(萬人積德)이라는 칭송이 구전되어 오면서 전국 각지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세대의 변천을 개탄하시며 운림에 생활을 등지시고 자연에 몸을 묻고 대성산 아래 절벽 끝에 특이한 축조법으로 육각의 정자를 짓고 자손들을 교육시키며 살았다 한다. 절벽에 암반과 자연석들 옥수가 흐르는 시냇물을 상징하는 뜻으로 반계정이라 하였다."고 장수군청에서 알려준다. 육모정 뒷벽 커다란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다.

[반계정 - 장안택 - 자 - 병준 (磻溪亭 張安澤 子 柄俊)이란 글을 새겨 놓은...]

반계정의 하이라이트는 정자뒷벽에 새겨져 있는 글씨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너무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글씨에 놀랠 정도이다. 이렇게 바위에 새기는 글씨가 요즘엔 문화재 훼손이 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선인들이 이렇게 훼손을 하지 않았다면 어느 곳을 가던지 그 위치나 그뜻을 알 길이 없는 곳을 볼 때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곳 번암의 문화유적을 다시한번 지도에서 찾아보며 커피한잔 나누었다.

[번암면소재 어서각 홍살문...]

어서각(御書閣) - 지방문화재자료 제 32호. 소재지: 번암면 노단리 1118-1 "이 어서각은 여러차례 중수를 거친 것으로 번암면 소재지에 있다. 입구에는 최근에 세운 철제 홍살문이 있으며, 이 홍살문을 지나면 삼문이 있고, 이 삼문 안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어서각이 있다. 정면의 중안칸에는 어서각이라는 현판과 중수와 관련된 4개의 현판이 벽면에 걸려있다. 어서각 안에는 조선 영조가 직접 쓴 글씨가 보존되어 있다. 영조는 즉위한 지 39년 되던 해 동짓날 입직한 조정대신들에게 흰죽과 꿩고기를 내려주고 대신들과 즐기며 추담 장현경에게 친히 시 한귀절을 하사 하셨다.

이때 장현경에게 지어주었다는 시의 원문을 보면 '칠순영상계말동랍 보루장반군신동식 석동한무루두죽 우금지당가 견태일'로 되어 있다. 장현경은 이 어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어서각을 창건하고 여기에 보관하였다." 라고 장수군청에서 알려준다. 글씨 그대로 어서 각, 임금님께서 글을 써 하사하실 정도면 장현경이라는 사람의 위세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위 반계정도 장안택이라 쓰여 있고 이 주변에 장재영의 옥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반암이라는 곳이 장씨들이 많이 살았던 것 같다.

[어서각이라 쓰인 현판만 보이고 입구문은 열쇄로 꽁꽁...]

번암을 생각하면 지난해 이곳을 둘렀던 생각이 난다. 이곳에서 동화호뒤로 넘어가면 흥부마을이 나온다. 아니 흥부마을에서 이곳으로 봉화산을 넘어 내려온 것이다. 개통한지 얼마되지 않아 차량이 없어 천천히 내려다보며 여행을 한 생각이 난다. 그리고 동화호계곡도 너무 좋은 곳이라 생각되 시간이 허락됐다면 지금도 다시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번암을 둘러보다 다시 남원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조금 후 대론삼거리에 도착하자 왼쪽엔 88고속도로가 인사를 나누면서 같이 가게 된다.

[장수군 번암면 대론초등학교 교정...]

[좌측으로는 고속도로와 지리산 능선들이...]

이곳을 지나면 항상 생각나는 것이 양쪽으로는 높은 산들이 하늘을 막아주며 시원한 들판엔 자그마한 천이흐르는 것이 아부 매력적이다. 번암에서는 육천이던 것이 대론을 지나 남원시 산동면 대기리를 지나면 삼촌으로 변하고 이어 다시 요천으로 변하는 그런 천이 남원까지 같이 가게 된다. 작년 이곳에서 찍은 낙조가 지금도 머리 속을 어지럽힌다. 볼 때마다 가고픈 그런 곳이 기도 하기 때문에 머리 속에 진하게 남아 있는 곳 중에 한곳이다.

[남원시 산동면소재 산동초등학교 교정...]

산동초교의 교목은 홍단풍이다. 교화는 진달래이고 교조는 까치이다. 운동장이 넓은 산동초교에는 18분의 선생님들과 6학급의 97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위해 땀을 흘리는 곳이다. 산동초교의 역사는 오래 전 1921년에 산동공립보통학교로 개교를 하고 요즈음 대상과 부절초교와 통합하여 산동초교를 이루고 있다 한다. 특히 이곳에는 6,7교시에 컴퓨터와 태권도를 가르쳐 적성과 특기를 살리기 위해 힘쓰시는 선생님들의 노고가 보이는 듯 하다.

[식련리 산위의 멋진 교회...]

[남원시 산동면소재 승연사 중창불사 안내글...]

[승연사 대웅전...]

[승연사 대웅전에...]

[승연사 요사채...]

[승연사 선방...]

[승연사 장독대...]

[승연사 선방뒤에 멋진 굴뚝이...]

[승연사 감로수...]

[승연사 해우소...]

승연사를 둘러보고 내려서면 목동리가 나오고 그곳 길가숲에 커다란 돌로 표지판이 눈길을 끌어 한번 올라가 보았다. 입구에는 밀양박씨 돈재공파 영효재 입구라 쓰인 입석안내에 따라 조금 올라서니 커다란 재가 자리를 하고 있었다. 경의문이라 쓰인 현판이 걸린 삼문 뒤로는 영효재가 그리고 삼문 앞에는 커다란 사자 두 마리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은 하얀 돌빛을 벗지 못해 영효재와 어울림은 쉽지 않지만 해태상이나 다른 동물들에 비해 사자의 형상 또한 멋이 있다고 생각이...

[밀양박씨 돈재공파 영효재 입구를 알리는 안내석...]

밀성(밀양)박씨 돈재공 휘 연생(衍生) 박연생은 휘 덕명의 아드님이다. 호는 돈재이니 지혜와 용력이 보통 사람과 다르고 늠름만 자세와 높은 지조는 우러러 볼만하여 단종때 충무시위사 대호군(大護軍)으로 계실 때 수양대군이 영의정에 오르고 위엄이 날로 높아지자 신숙주 한명회 권람과 정인지등 모삿군이 수양의 처소를 드나들며 왕위에 오르기를 논의하였다. 공은 수양과 절친한 사이이나 수양의 부르심을 거절 남하할 것을 결심하고 천첩에게 이 편지를 보여주라 하시고 고향 태인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장성 아치실로 옮긴 뒤 다시 공은 독신으로 담양 월산 사위 이석손 집에 은신한 것이다.

수양이 1455년에 왕위에 오르고 12월27일 전지(傳旨)하기를 대호군 연생은 원종공신 삼등에 녹(錄)한다 드디어 교서를 내렸으니 살펴보면『 일자급을 더해주고 자손은 음직(蔭職)을 받고 후세에까지 유죄를 지으면 그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 한다. 공신 가운데 통정대부 이상은 자손 형제 생질 조카 사위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원에 따라 산관(散官: 자급만 받고 보직을 받지 못한 관리)일자급을 더하여 주고 죽은 자에게는 각각 본등에 의하여 시행하고 일자급을 추증한다. 죄를 범하여 산관이 된자는 일자급을 더하여 주어 서용(敍用)하며 영구히 사용하지 못하게 된 자에게는 벼슬길에 통함을 허락한다.

고신(告身)을 거둔자는 돌려주고 첩의 아들은 한품(限品)을 작용하지 말고 공사천인(公私踐人)은 모두 천인을 면하게 하고 사천(私賤)을 주인에게 공천(公賤)으로 보상하게 한다" 하였다. 그러나 공께서는 병든 몸이라 핑계하며 개관(개관)하고 불취(不就) 하니 이때부터 우리는 태인박씨(泰仁朴氏)가 된 것이다. 공은 일남 일녀를 두고 돌아가시니 제사는 2월7일 묘는 담양월산 산34번지 축좌(丑坐)이다 배숙부인 묘는 공과 함폄이다. 세조실록과 동이열전에 실려있다. 후손 동직(東稷)이 지석(誌石)을 묻다. 9세손 매헌행중(梅軒行重)께서 사적을 적고 수남장흥고석진(秀南長興高石鎭)선생이 사장(事狀)을 짓고 세손 익찬 황윤석 선생이 전(傳)을 쓰고 면암 최익현 선생은 묘갈(墓碣)을 썼다.

1934년에 재실을 담양 월산에 세우고 후손 한용 균상이 재기를 썼다. 후손 동북의 특단의 관심과 노력으로 경주 이씨 문중으로부터 선산을 되돌려 받고 1971년에 전 종친의 힘으로 석봉 비갈명 문무석 수석 석등을 격에 맞게 단장하였다. 1833년 (순조34) 공을 주벽으로 교리 김개(金漑)두분을 추모하기 위해 유회(孺會)의 결의에 따라 수산사가 장성 황룡 수산리에 창건되고 노사기정진(蘆沙奇正鎭)선생의 상양문과 축문 부사 흥영섭(府使 洪永燮)의 예성문이 있다.

1868년 (고종 6)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훼철된 수산사(水山祠)를 1976년 사론(士論)에 따라 장성 황용 신호리에 302-2 복설(復設)하고 아곡 박수양(莪谷 朴守良) 백우당 박상의(栢友堂 朴尙義) 그리고 눌헌 박상지(訥軒 朴尙智) 세분을 추배하고 1986년에 돈암 박자온(朴自溫)을 다시 추배하니 황주 변시연(황주 변시연)의 예성문과 상향축문(상향 축문)이 기록되어있다. 본사복설(本祠復設)에는 후손 래열의 공헌이 다대(多大)하고 순보(順甫)씨와 일구(鎰求)씨의 숨은공 또한 적지 않다. 라고 박씨족보닷컴에 자세하게 나와 있어 이곳으로 옮겨본다.

[경의문(敬義門)...]

[영효재(永孝齋)...]

밀양박씨의 영효재를 둘러보고 다시 좌우로 경치를 감상하며 남원에 가까워 질수록 요천의 줄기는 넓어짐을 느낄 수 있다. 요천 줄기엔 보 가 많이 설치되어있어 곳곳에 볼거리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또 새들이나 물고기들의 모습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물론 다른 천에 서는 못본다는 것이 아니라 보에서 보는 것은 또 틀리기 때문이다. 이제 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은 임실군 산서로 가는 길인데 화물차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다.

삼거리를 지나기 전 지도를 보니 도통동 단군성전이라 쓰여져 있다. 우회전을 급히하고 721번도로 조금 언덕을 오르니 좌측으로 단군성전표지판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주차장과 아직은 끝나지 않은 것같아 보이는 성역공사의 잔해가 보인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홍익문이라 쓰인 단군성전의 삼문 앞에서 좌우에 서있는 비와 비문들을 읽어본 후 열려있는 문을 이용 단군성전으로 들어설 수가 있어 무척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한편으로는 경건한 마음으로 성전에 올랐다.

[단군성전의 삼문인 홍익문...]

[단군성전 내삼문인 이화문...]

[남원시 산동면소재 단군성전...]

[남원시를 지나 구례를 향하여...]

[남원시 밤재터널앞 성산과 애마...]

[너무 평화스러운 섬진강가...]

[금방 고기라도 튀어오를 것 같은...]

남원시내를 통과하지 않고 19번도로가 외각으로 빠지는 바람에 남원의 모든 것은 여행기에 선을 못 보이게 된다. 그리고 또 19번 도로 주변에서 가까이에는 별로 커다란 지형지물이 많지 않은 까닭에 휭하니 남원을 지나 남원시와 전남 구례를 잇는 밤재 터널을 통화해 천천히 지리산을 보내 내려와 구례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이곳에 오면 왼지 고향이나 온 것처럼 서먹함이 없어진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고 아마도 동네같은 느낌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아마도 이곳여행의 횟수가 엄청나니 그럴 수밖에...

그리고 이번여행기와 또 다음에도 마찬가지 겠지만 구례에서 하동, 그리고 남해는 수차례 여행기가 있어 그냥 위치나 서술하면서 지나게 될 것같다. 그래도 중요한 향교나 학교 그리도 또 빼놓은 곳들은 꼭 들러서 내려갈 계획이다. 이제 종착지에 도착을 하였으나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아 성산과 연곡사를 들러 보기로 하고 피아골로 들어선다. 연곡사에 도착해 짧은 시간에 뒷산을 누비며 아름다운 부도들을 찍고 나니 벌써 황혼이 저물어 붉은 빛을 내뿜는 하늘을 볼 수 있다. 이제 성산의 보금자리 곡성으로 들어가 저녁과 함께 힘들었던 하루를 마감을 하고 내일 남해까지 같이 내려가 19번 도로 여행의 종지부를 찍을 생각이다. -<끝>-

여행일시 : 2005년 05월 10일, - 글 / 그림 - [김영윤의 여행보따리] 도시애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