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_충남 부여군 낙화암, 고란사에 가면.... by 도시애들


부소산성 올라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자루에서 다시 밑으로 내려가면 벌써 금강이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갔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돌이 반들반들 하게 달아있을 정도로 무수한 사람들이 낙화암을 만나러 이길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무엇이 이곳을 이렇게 유명하게 만들었을까? 낙화암?, 삼천궁녀?, 아니다 백제 여인들의 절개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공포와 좌절 속에 몸을 떨며 이곳으로 올라와 금강을 향해 몸을 던졌을까 하며 연신 마음에 찡 함이 온다.

[사자루에서 낙화암가는 돌계단 길...]

[낙화암위 백화정 정자가 반기고...]

문화재 자료 108호로 1984년 5월에 지정된 백화정(百花亭)은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백화정(百花亭)...]

[백화정(百花亭)...]

낙화암위 백화정에 대해 역사적으로 조금더 생각해 보면,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백마강변의 부소산에 있는 바위.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백화정(百花亭)안쪽에 백화정기가...]

[백화정(百花亭)에서 다정스러운 척!...]

[백화정밑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백화정밑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백화정밑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백화정밑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 즉 여자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용담(勇談)이 많은 영주(英主)였는데, 여러 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성세(聲勢)를 높인 뒤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망해정(望海亭)에서 궁녀들을 데리고 가무주연(歌舞酒宴)의 향락을 일삼았다. 좌평 성충(成忠)은 이를 근심하고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 그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마음이 아파서 죽고 말았다. 이러할 때 일찍이 백제의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무열왕 및 김유신(金庾信) 등의 영주와 명신(名臣)이 나타나서 나라의 힘을 크게 길러 복수를 하고자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은 4천의 적은 군사로써 황산(黃山)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효(孝)를 데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성문은 부서져 열리고 말았다.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대왕포(大王浦)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고 전해준다.

[백화정밑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백화정밑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선착장...]

[백화정밑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지금은 영업을 못하고 있는 폐허된 건물이 흉물스럽게...]

[운치는 있어보이는데 너무 흉칙한 모습도...]

[고란사 경내...]

여름에 이 곳 절집에 서면 울창한 나뭇잎이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더욱 청량한 느낌을 주곤 한다. 그만큼 우거진 나뭇잎 때문에 백마강의 푸른 물을 볼 수 없게 되고, 그만큼 절 앞쪽을 가리고 있어서 강 쪽에서도 고란사의 전경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다 떨어지면 슬프도록 차가운 강물이 아주 가까이 눈 앞에 다가오고, 뱃전에 앉아야만 고란사의 전체를 살펴 볼 수 있게 된다. 일찍 스러져간 백제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고찰 고란사는 햇볕이 잘 들지 않고 언제나 그늘져 슬픈 영혼의 느낌을 담고 있다. 고란사의 뒤쪽에는 바위 틈새에 수줍게 피어있는 고란초가 있으며, 앞쪽에는 도도히 흐르는 백마강이 언제나 함께 하여, 말없이 인간세의 흥망을 지켜보고 있다. 사찰 앞을 울창하게 가려 나뭇잎 틈새로 조각조각 보이는 백마강의 짙푸른 강물에는 그늘이 묻어나 처연한 느낌을 주는데, 아마도 백마강을 떠도는 백제 고혼들이 부르는 슬픈 영혼의 노래가 바람 불 때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에 섞여 우리의 귀에 들리는 듯하다.

[고란사 회고루(懷古樓)...]

법당에 걸려 있는 현판 가운데 '회고루(懷古樓)'라고 씌어진 현판이다. 지나간 옛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누각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법당의 걸려 있는 현판 가운데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씌어진 현판이다. 글씨 옆에는 18세의 어린아이 신동호(申東浩)의 글씨라는 의미의 글도 함께 적혀 있다. 진공묘유는 공(空)에도 유(有)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진공과 묘유는 따로따로의 별개가 아니다. 진공이기 때문에 연기(緣起)의 모든 법이 완숙하고 묘유이기 때문에 인과(因果)의 만가지 법이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길 게 7칸으로 꾸며진 고란사 법당 회고루...]

대웅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비교적 규모가 큰 불전이다. 지붕틀 가구는 대들보 아래에 걸쳐서 우물천정이 가설되어 있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전체 7칸 중 좌측 2칸을 요사로 사용하고 있으며, 법당으로 사용하는 나머지 오른쪽 5칸 모두에는 유물마루를 깔고 뒷면 중앙부분에 긴 불단을 조성하였다. 현재의 고란사 대웅전 건물은 1900년에 은산의 숭각사(崇角寺) 건물을 옮겨 지은 것이다. 1959년 대웅전을 개축할 당시 대들보에서 나온 상량문에 의하면 이 건물은 1797년(정조21)에 중건하였다는 내용이 적힌 묵서명이 나왔다고 한다. 대웅전 건물에 사용된 주춧돌은 여러 시대의 것들이 섞여 있어서 묘한 느낌을 준다.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고, 또 고려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함께 사용되어 있어 시대에 따라 굴곡진 사찰의 역사를 말 없이 대변하고 있다

[고란사(皐蘭寺) 해강 김규진의 필제라고...]

부여 부소산에 있는 절인 고란사(皐蘭寺)는 문화재자료 98호로 1984년 5월 지정되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 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과 새로 지은 삼성각이 있다.

[고란사 법당 내에는...]

법당안의 구조는 6벌대로 쌓은 높은 화강석 기단 위에 방형과 원형, 그리고 복련판이 조각되어 있는 부재들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물론 이러한 부재들의 일부는 백제시대의 초석을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의 것을 전용한 것들로 여겨진다. 공포는 무출목 이익공 계통이나 앙설형으로 뻗은 초익공의 상단에는 연꽃이, 수설형으로 뻗은 이익공이 아래에는 연봉우리 등의 조각이 되어 있어서 장식적 경향이 매우 심하다. 건물의 외곽에는 오색빛 영롱한 단청을 칠하여 법왕의 거처를 화려하게 장엄하고 있다. 내부의 성보유물은 아미타삼존불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 밖에 산신탱화 등 근대에 제작된 탱화 3점도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의 바깥 추녀 아래에는 백제를 추억하는 시인묵객들이 남긴 글들이 여러 편의 편액에 담겨 전해지며, 그밖에 1903년에 고란사를 고쳐 지은 중수기문 등 많은 현판들이 걸려 있다.

[고란사 영종각...]

고란사의 범종각은 근래에 지어졌는데, 영혼을 올리는 종소리를 기원하여 영종각이라 부른다. 영종각의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정자형 건물이다. 깎아지른 암벽 위 한쪽 구석에 의지하여 위태롭게 서 있다. 낮은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얹은 민도리집인데, 오래되어 색이 바랜 단청이 고색창연한 느낌을 더해준다. 전각 안쪽에는 근래에 조성된 범종이 걸려 있다.

[새로이 단장중인 고란사 삼성각...]

[고란사 약수터인 고란정...]

[고란약수에 대한 전설...]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도중에...]

[그새에 성산은 나를 찍고...]

[우리가 탈 배가 들어오고 있는데...]

[이수중암이 조룡대(釣龍臺)라고...]

[조룡대(釣龍臺) 라고 빨간 글씨가 보이는데...]

조룡대(釣龍臺) 는 백마강(白馬江) 가운데 있는 사람 하나가 겨우 앉을 만한 크기의 바위 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중국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킨 뒤, 어느날 대왕포(大王浦) 하류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 바위나루〔窺巖津〕를 지나 낙화암(落花巖)까지 잇대어 있던 수백 척의 당나라 병선이 순식간에 뒤엎어지고 말았다. 소정방은 이 돌연한 괴변이 왜 일어났는지를 일관(日官)에게 물었다. 일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제를 지켜온 강룡(江龍)이 화를 낸 것이라고 하였다.

강룡을 퇴치할 방법을 소정방이 다시 물으니 일관은 용이 좋아하는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낚는 것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쇠를 두들겨 낚시를 만들고 굵은 철사를 낚싯줄로 하여 백마를 미끼로 강 가운데 바위 위에 앉아 용을 낚기로 하였다. 그러자 용은 미끼인 백마를 삼켜서 잡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하여 뒷날 사람들이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고 하는 이 바위를 조룡대라 하고,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은 강이라 하여 금강(錦江)의 줄기인 부여 부근 일대의 강을 백마강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여현(扶餘縣) 고적조(古蹟條)에 나온다. 그런데 ‘물고기’를 한자로 적을 때 ‘어룡(魚龍)’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소정방이 어룡을 낚은 것을 뒷날 잘못 전하여 용을 낚았다고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고 전한다.

[승선후 저 멀리 백마강교가 흐미하게 보이고...]

[세찬물결을 일구며 유람선은 구드래 선착장을 향하여...]

[배가 한 바퀴 돌아나가며 선착장과 작별을 고한다. 편도이기에...]

[고란사 종소리가 울리는 듯 아쉬운 아듀를...]

[선착장과 조룡대, 그리고 우측으로 10여미터나 되는 절벽 낙화암이 또렷이...]

[낙화암(落花岩)이라고 빨간 글씨로 새겨 놓아...]

문화재자료 110호로 1984년 5월 백화정과 같이 지정된 낙화암(落花岩)은, 충남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낙화암은 역사를 머금고 아무 이야기도 해주질 않는데...]

[고란사가 아스라이 ...]

이곳을 지나며 고란사와 낙화암을 지나치니 꿈꾸는 백마강이란 노래가 생각이 난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 버린 옛날을 애닳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서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면은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데, 그누가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낙화암 달빛만 옛날 같구나....

[물결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해주는 것 같아...]

[일국의 흥망성쵀가 이렇게 허무할 수가...]

[구드래 선착장이 코앞에...]

이번기회에 금강이 왜 백마강으로 불리우는지 알 게 되었는데, 확실이 알아보면 사자하(四河)·백강(白江)·마강(馬江)이라고도 한다. 그 범위는 정확하지 않지만 청양군 장평면과 부여군 규암면 경계를 따라 흐르는 금강천(錦江川:또는 金剛川)이 금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부터 부여군 석성면 위쪽까지를 백마강이라 부른다. 부소산(扶蘇山)을 끼고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심하게 곡류하는 사행하천이다. 부소산의 북쪽 사면을 침식하여 절벽을 이루고 부여읍 남부 일대에 넓은 퇴적사면을 발달시켰다.

공격사면인 부소산에는 낙화암이라 하는 높이 약 10m 가량의 침식애(浸蝕崖)가 있으며, 낙화암 상류 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강 가운데 조룡대(釣龍臺)라 하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적을 쫓아 금강을 건너려 할 때 강물 속에 교룡(蛟龍)이 방해하므로 교룡이 좋아하는 흰 말을 미끼로 조룡대 바위 위에서 잡아올렸다고 하여 강 이름을 백마강, 낚시했던 바위를 조룡대라 했다고 한다.

663년(문무왕 3)에 백제와 나당연합군과 일본의 수군이 격전을 벌였던 백촌강(白村江)의 싸움터가 백마강이라는 설이 있다. 백마강의 남부에는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으나 하상이 높아 범람이 잦은 홍수 상습지역이다. 따라서 홍수피해를 막고 경지의 효율성을 증대시켜야 하며, 백마강의 자연경관은 백제권의 문화관광자원과 함께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라고 백과사전에 적혀있다.

[멀리 한 바퀴 돌아 구드래 선착장으로 골인...]

왼지 괜히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백제 멸망의 아픔을 느끼고 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배를 타고 고란사와 낙화암을 직접 물에서 봐서 더욱 애절함이 느껴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에서 내려 구드래 조각공원까지 가는 동안 백마강만 바라보게 되어 우선 둑방으로 올라가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을 하염없이 보았다. 옛 도읍지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한강유역이라면 공주를 거쳐 이곳까지 도읍을 옯겨가며 쇠퇴한 백제의 혼은 무엇을 이야기 해주는지 우리는 지금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서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끝>-


덧글

  • 오서방 2007/02/09 09:18 #

    한 두곳 빼고는 모두 가보았는데
    이렇게 상세히는 몰랐지요.......^^;;
    1월 중순엔 궁남지에 갔었고.....^^;;
    감사드립니다...^^;;
  • 도시애들 2007/02/11 03:30 #

    역사를 생각하며
    여행을 하면 멋진데
    어데 그런 마음적 여유가
    있어야 말이죠..ㅋㅋ
  • ★천년지기★ 2007/02/09 09:57 #

    꿈꾸는 백마강...노래 참 좋은데..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도시님!
  • 도시애들 2007/02/11 03:31 #

    정말 많이 부르던 노래죠..
    백마강 노래가 몇개 있지요..
    다 즐겨부르던..ㅎㅎ
  • 碧泉(벽천) 2007/02/09 10:57 #

    성산님과 좋은 시간이셨네요.
    부럽습니다.
    제가 낙화암을 처음 갔던 것이 중학교 3학년이라 기억하네요.
    위에서 내려다 보는 낙화암은 참으로 멋졌다고 기억하고 있어요.
    늘 안전한 여행이 되시길 빌어요.
    또 뵙지요.
  • 도시애들 2007/02/11 03:33 #

    아마도 경주하고 이곳은 수학여행
    지정코스일것 같아요..
    저도 몇번 오 봤었지만..
    이번같이 느낌이 와닿은적은
    없었답니다. 에효...
  • 쉼표하나 2007/02/10 10:39 #

    낙화암과 삼천궁녀.... 꽃잎이 되어 백마강에 몸을 던졌을 백제의 여인네들...
    그런데 삼천이라는 숫자가 어떤 근거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패망해 가는 나라에 군사가 삼천도 아니고 궁녀가 삼천이라... 역시 역사는 승리자의 산물인듯 싶네요.
    낙화암과 삼천궁녀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낙화암을 갔던 가이드가..
    "여러분~~ 여기가 낙화암이라는 곳이에요... 어쩌구 저쩌구... 여기서 삼천 궁녀가 ...어쩌구 저쩌구"
    이 말을 듣던 한 학생 왈..
    "선생님, 물에 떨어지기 전에 바위에 부딪쳐서 죽을거 같은데요... 그리고 삼천명이 여기로 떨어졌으면..... 음.... 삼천번째 궁녀는 떨어지는게 아니고 위로 올라갔을거 같은데...."
    금강의 수심, 낙화암의 높이와 사람의 크기를 생각해 봤을때 이 초등학생의 계산이 맞지 않을까요.ㅋㅋ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지지 못했던 삼천번째 궁녀....
    낙화암에 갈때마다 그리고 이렇고 볼때마다 생각나는 일화입니다.. ^^
  • 도시애들 2007/02/11 03:36 #

    누구나 의아해 하는 것이...
    바로 이점인데...아주 멋지게 표현..ㅋㅋ
    아마도 궁녀가 삼천이 아니고...
    중국풍인가 봅니다. 뻥튀기..ㅋㅋ
    백제의 여인들이 절개 이겠지요..
    궁녀가 삼천이며..에효....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