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_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성에 가면.... by 도시애들


부여에 저녁늦게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정림사지를 돌아보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본 다음 계백장군동상과 또 박물관 앞 백제 금동대향로를 커다랗게 만들어놓은 소공원에서 잠시 머물고, 부여박물관을 관람한 후 바로 옆에 위치한 궁남지를 바삐 돌아보고 바로 낙화암과 고란사로 유명한 부소산성을 찾아 이렇게 정신없이 달려와 입구에 들어서니 넓은 주차장이 준비되어 있는데 이곳도 역시 주차비는 무료이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건너편 중화요리집에서 자장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다시 부소산성 입구 사비문 앞으로 다가선다.

잠시 앞에 마련된 공원에서 식후 산책겸 조형물들을 찍으며 잠시 거닐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백제금동대향로, 그리고 금동관세음보살입상은 정말 언제 보아도 섬세한 조각기술에 입을 다물 수가 없는 경이한 작품들이다.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결국엔 사비문 옆에 자리하고 있는 매표소에서 4000원을 내고 입장을 한다. 사비문 성벽에는 멋진 서동요 포스터가 휘날리고 있다. 아마도 내일 달려가야 할 장소이기도 해 반갑게 본다.

[부소산성입구인 사비문이 멀리보이는 주차장에서...]

[부여 관광안내도...]

[금동삼산관반가사유상(金銅三山冠半跏思惟像)...]

국보 제 83호인 금동삼산관반가사유상(金銅三山冠半跏思惟像) 은 삼국시대의 보살상. 높이 93.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더불어 그 크기와 조각 수법에 있어서 삼국시대 금동불상을 대표하는 걸작품이다. 출토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20년대 이후에 발견되어 오랫동안 덕수궁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머리에는 삼면이 각각 둥근 산 모양을 이루는 관을 쓰고 있어 ‘삼산관반가사유상(三山冠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삼국시대에는 많은 반가사유보살상이 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평안남도 평양시 평천리 출토의 고구려 금동미륵반가상(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18호)이나 충청남도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의 왼쪽 협시인 백제의 반가사유상 그리고 경주 단석산마애불상군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조각된 신라의 반가사유상은 삼국의 각 지역에서 비교적 초기 작품에 속하는 예들이다. 특히 이 상은 그 보관 형태나 군의(裙衣)의 주름 처리 방식 등에서 평천리 출토 금동미륵반가상이나 단석산마애불상군 중의 반가사유상과 양식적 계보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하고도 균형 잡힌 신체 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코·입의 표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으로서의 완벽한 주조 기술을 보여 준다. 더욱이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보살상의 자비로움은 우수한 종교 조각으로서의 숭고미를 더해 준다.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국보 제 187호인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는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이 있다.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고 문화재청에서 알려준다.

[금동관세음보살입상(金銅觀世音普薩立像)...]

국보 제 293호인 금동관세음보살입상(金銅觀世音普薩立像)은 국보 제 293호로 1970년에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의 절터에 묻혀 있던 무쇠솥에서 다른 하나의 관음보살입상과 함께 발견된 보살상으로 높이는 21.1㎝이다. 머리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엔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치고 있고, 가슴에 대각선으로 둘러진 옷은 2줄의 선으로 표시되었다. 양 어깨에서부터 늘어진 구슬 장식은 허리 부분에서 자그마한 연꽃조각을 중심으로 X자로 교차되고 있다.

치마는 허리에서 한번 접힌 뒤 발등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데 양 다리에서 가는 선으로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작은 구슬을 살짝 잡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져 옷자락을 잡고 있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2중의 둥근 받침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얼굴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비례에 맞는 몸의 형태, 부드럽고 생기있는 조각수법을 통해 7세기 초 백제시대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고 전해준다.

[부소산성 안내도...]

[부소산성의 정문인 사비문...]

[삼충사의 정문인 의열문...]

[삼충사 내삼문인 충의문...]

[삼충사 중건사적비(三忠祠 重建事跡碑...]

[세분 영정이 모셔진 삼충사(三忠祠...]

문화재자료 115호인 삼충사는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흥수·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충신으로, 좌평으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 죽었다. 흥수는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다 대신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고 결국은 멸망하였다. 계백은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결사대 5,000여명을 뽑아 지금의 연산인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1957년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백제 좌평 성충공 영정...]

[백제 장군계백공 영정...]

[백제 좌평 흥수공 영정...]

[삼층사입구 넓은 마당...]

[삼충사에서 영일루 오르는 길목 옆 시멘트는 좀?...]

[영일루(迎日樓)전경...]

문화재자료 101호인 영일루(迎日樓)는 부여에 있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관아문이라지만 풍기는 건물의 느낌은 해맞이 누각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영일루(迎日樓)현판과 뒤에 ...]

[영일루 2층 누각으로 올라오고 있는 친구 성산...]

[영일루 누각에 멋진 용머리가...]

[쌍북리 군창지(雙北里 軍倉址)...]

문화재자료 109호인 군창지(軍倉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군수물자 창고 유적지. 이른바 내관(內官) 가운데는 곡물사무를 맡은 곡내부(穀內部)와 창고사무를 맡은 내경부(內경部)·외경부(外경部) 따위가 있었는데, 대규모 국창(國倉)으로서의 구실을 한 것이 백제 말기의 수도인 부여에 있던 사비성의 동쪽 정상부에 있었다. 이 곳은 영월대(迎月臺)라 하여 넓고 평평한 광장인데, 민족항일기에 이곳에서 길이 약 70m, 넓이 약 7m, 땅속 깊이 47㎝ 정도의 창고유적이 발굴되었다.

이곳에선 타다 만 쌀·보리·콩 등의 찌꺼기가 많이 나왔다. 그리하여 이를 백제군창이라 이름붙인 것인데, 이는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사비성이 공격을 받고 망할 때에 모두 불에 타버린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지금도 이 군창지 일대를 파보면 불에 탄 쌀·보리·콩 등이 많이 나오고 있어 사비성이 함락될 때의 비극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한편, 이들 불에 탄 군량들은 백제시대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 것이라는 설도 있다.

[군창지에서 흙성벽을 딸까는 재미로 즐기며 가다보면 이런길도...]

[뒤에 도톰하게 올라온 부분이 흙성인 부소산성 이라는데...]

사적 제5호. 둘레 2,200m, 면적 약 74만㎡.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접해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1차로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538년(성왕 16)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이었다. 대개 성왕의 천도를 전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500년(동성왕 20)경 처음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성왕이 천도할 무렵 개축한 뒤 605년(무왕 6)경 완전한 성을 이룬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먼저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테뫼식 산성은 현재 군창(軍倉)터가 있는 곳으로 둘레 1,500m의 성벽을 등고선을 따라 거의 토축했는데, 일부 석축한 부분도 있다. 이 성 안에는 1915년 불에 탄 쌀이 발견된 군창 자리와 백제식 가람의 방형 건물터가 있으며,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도 이곳에 있다가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영일루(迎日樓)와 반월루(半月樓)가 있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 지점 사비루(泗樓) 부근에 약 700m 둘레의 테뫼식 산성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비루와 망루지(望樓址)가 남아 있다. 이 두 테뫼식 산성의 외곽선을 포곡식 산성이 연결하고 있어 백제의 독특한 산성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내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 골짜기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고란사(皐蘭寺), 낙화암(落花巖), 서복사(西復寺) 터, 궁녀사(宮女祠) 등이 있다. 부소산성은 주위의 보조산성인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했다고 한다.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신석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까지 유행한 집터 유적.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라고도 한다. 일정한 규모의 지면을 지상에서 30∼100㎝ 정도의 깊이로 넓은 구덩이를 파고 그 밑에 바닥시설을 한 뒤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은 주거형태로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집터양식이다. 유럽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이미 움집터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나 그 예는 많지 않고 신석기시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주거양식으로 된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이후가 되면 문화 정도에 따라 지상가옥(地上家屋)으로 발전하는 곳도 있다.

지역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움집터가 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까지의 대표적인 주거양식이 되고 있다. 완전한 지상가옥으로 넘어오는 것은 4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그러나 최근 부여 부소산성 내에서 조사된 움집터는 내부 화덕시설에 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평와편(平瓦片)이 깔려 있어 서민용·간이시설용으로서의 움집터는 삼국시대 후기까지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월루에서 내려다본 부여시내...]

[반월루(半月樓)...]

반월루에 도착해 2층누각으로 올라보니 반월루기(半月樓記) 라는 한글로 된 편액이 있어 읽어 보니 [반월성에 기대서서 멀리 바라보니 떼지어 날으던 기러기는 간데 없건만 갈대 우거졌던 옛구룡평야는 벼이삭이 바다를 이루고 수비정에 구비치는 맑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오는 돛단배는 흔히 못보는 풍경이요 저녘의 노을빛에 붉게타오르는 백제탑이 눈앞에 있고 잔잔히 흐르는 백마강에 잠긴달은 물속에 비치니 달빛이 다칠세라 물은 조심조심 흐르고 정막을 깨는 고란사의 새벽종소리는 낙화암에서 잠든 두견새를 깨우고,

사자루 넘어 반월성을 타고 나그네의 귓전을 울리며 아지랑이 아른거리고 봄나비 춤을 추며 꽃향기를 찾아 사비성으로 태자골을 넘나드니 여기가 부소산이라오. 이슬비 나리는 보소산을 다시보고 싶건만 이곳에 정자없음이 한이 였다가 전 군수 전준기(田俊淇)씨의 애쓴 보람으로 성루지에 정자가 서게되어 그 이름은 성따라 반월루라 하였으니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시어 잠시 쉬었다가 가시오. 서기 1972년 2월 부여군수 정찬경(鄭燦璟)씀] 이렇게 쓰여 있었다.

[멀리 궁녀사가 반갑게 보이고...]

[궁녀사 외삼문...]

[궁녀사(宮女祠)현판이 걸린 사당...]

백제 의자왕 20년(660)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삼천궁녀들은 적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낙화암에서 꽃처럼 떨어졌다. 이러한 삼천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세운 사당이다. 궁녀사 안에는 세명의 궁녀의 초상이 있다.

[삼궁녀 영정이 모셔진 궁녀사 사당안에는...]

[삼궁녀 영정...]

[궁녀사에서 산길로 오르면 지금은 말라 버린 샘터가 있고...]

[사자루(泗비樓)...]

문화재자료 99호인 사자루(泗樓)는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비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비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사비루는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이름을 새긴 백제시대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어 더욱 주목받는 장소이다. 2002년 1월 3일 사비루라는 현판은 일제의 강권하에서 굴욕적으로 표기된 사항이어서 문화재명칭을 사자루로 변경하기로 하였다. 현판에는 사비루라 적혀있어 착각을 하게 해준다.

[사비루 뒤편에는 백마장강이라 쓰인 현판이...]

[백화정 오르기전까지의 길들은 대부분 이렇게 잘 정돈된...]

부여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부소산성의 백화정밑에 와있다. 벌써 내려가는 길목엔 백마강의 흐르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 서부터는 등산로 같은 기분이 난다. 백제 멸망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절개를 지킨 백제여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백화정이 보이기 시작한다. -<끝>-


덧글

  • 쉼표하나 2007/02/10 10:52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해지시고, 지금은 문화재청의 청장님으로 계신분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곳 부소산성을 우리나라에서 산책하기 가장 좋은 곳이라고 표현을 하셨다는데.....
    지난 봄날 벚꽃 만개했던 부소산성의 나른한 봄날이 생각나네요.... ^^
    그런데 길은 저런 시멘트, 네모반듯한 보도블럭보다는
    백제가 전돌로 유명하니까, 다양한 문양의 전돌로 길을 만들면 참 좋을텐데...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가지고설랑은 길 이름도 전돌 문양에 따라서, 도깨비길, 봉황길, 반룡길... 이렇게 하면 어떨까 싶은데....
    어렸을때는 부여시내의 보도블럭이 이런 전돌의 문양이었는데, 요즘에는 아니더라고요.
    참... 아쉬운 부분입니다.(부여의 예산이 부족한가... ^^)
  • 도시애들 2007/02/11 03:42 #

    정말 좋은생각을 가지고 계셨군요..
    그러지 않아도 성산친구와 제일 불만이 보도블럭이었답니다.
    공주산성은 그냥 흙길 그래도 두어 낙엽이 엄청난 미끄러운길을
    염려했었는데...참 부여 시내엔 모두 연꽃구름무늬 보도블럭으로
    되어있던데요...붉은색이 좀 그렇지만..ㅎㅎㅎ
    제가 배재학교 다닐땐 그 앞길이 돌로만든 길이었는데
    그걸 다 파버리고..ㅎㅎㅎ 참 지난번 난곡 호림박물관동네에
    다시 돌로 만든 길이 재현되어있더군요..반가웠어요...
  • 절문오빠 2007/02/13 23:28 #

    신혼여행 코스였는디.. 오래전 일이지만 추억이 새롭습니당..
  • 도시애들 2007/02/13 23:50 #

    그러셨군요...
    신혼여행지는 각별하죠..
    저도 아산 현충사에 개나리가 폭발을 하던
    4월에..ㅎㅎ 문화호텔..케케케
  • 성훈이 아빠 2007/03/14 21:34 #

    부소산성.. 역사의 영욕을 함께 지닌 백제의 마지막 도성.. 토석 혼축성이며 부소산성에 대해 아직도 더 발굴조사를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삼충사와 궁녀사를 지날 때는 숙연해 지는 마음이 듭니다.영일루와 사비루는 좀 낯이 익다 했더니 모두 관아문을 가지고 온것이군요..조선말 때 전국의 관아문을 통일하여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제가 다녀왔던 보령,서천등지에서 본 관아문과 굉장히 닮았군요.. 언제가 꼭 가봐야얄 곳이라서 미리 점검도 할겸 이렇게 방문을 했습니다.. 유명하고 잘 알려진 산성도 가보고 싶고..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고 보잘것 없는 산성도 가고 싶고.. 마음만 굴뚝입니다..하하하..선생님.. 잘 보고 갑니다.
  • 도시애들 2007/03/16 00:03 #

    정말 학교다닐때 수학여행후
    몇십년만에 다녀온 곳이라
    지금도 머리속에 생생히...
    정말 역사를 떠나서
    너무 멋진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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